예레반은 아르메니아의 수도이자 가장 큰 도시이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 인간이 살아온 도시 중 한 곳이다. 예리반, 예레브니라는 이름으로도 불렸었다. 흐라즈단 강을 끼고 발달한 도시이며, 아라쿠스 강의 지류가 시내를 흐른다. 예레반은 아르메니아의 행정, 문화, 산업의 중심지이다. 기계 제조나 금속업, 포도주, 브랜디 제조, 담배 제조업이 발달해 있다. 1918년 이래 아르메니아의 수도가 되었으며, 아르메니아의 역사상 열세 번째 수도이다
1920년 예레반에 위치한 공화국 광장에 설립된 국립 박물관으로서 아르메니아의 고고학, 화폐, 민족학, 현대 역사, 복원 등의 관련된 400,000만여 점의 국보를 보유하고 있다. 이 중 35%는 고고학, 8%는 민족학, 45%는 화폐, 그리고 12%의 각종 문서 자료들 이다. 이곳에서 아르메니아의 건축물, 고고학, 역사 유물을 보존, 복원하는 작업을 관장하고 있으며 1948년부터 고고학 발굴에 관련된 보고서를 정기적으로 발행하고 있다. 또한 아르메니아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교육과 과학 프로그램을 운영중이다. 주요 전시물은 기원전 14-15세기경의 새 조각상, 기원전 15-16세기경의 뚜껑 달린 삼색 항아리, 가원전 5-6세기경의 늑대상 등이다.
아르메니아 알파벳을 창제(405년)하고 아르메니아 학교를 창립한 메스로프 마슈토츠(Մեսրոպ Մաշտոց, Mesrop Mashtots, 361?~440)의 이름을 딴 ‘마슈토츠 마테나다란(Mashtots Matenadaran)’은 고문서에 관한 학술연구기관으로서, 아르메니아의 수도인 예레반(Yerevan) 북서부에 있는 아름다운 경관의 구릉 지역에 있다. 이곳에는 약 17,000점의 필사본 컬렉션이 있는데 아르메니아 고대 및 중세시대의 과학 및 문화, 즉 역사·지리·철학·문법·법률·의학·수학·문학·채식화 등 거의 모든 영역에 관한 필사본이 있고, 아랍어·페르시아어·그리스어·시리아어·라틴어·에티오피아어·인도어·일본어 등으로 쓰인 필사본도 있다.
마테나다란에는 그리스어나 시리아어로 된 초기 그리스도 교부의 저술의 아르메니아어 번역본(5세기, 원본은 사라지고 없다)을 포함한 중세 필사본 컬렉션이 소장되어 있다. 그 가운데는 알렉산드리아의 필론(Philo)이 저술한 『창세기에 관한 600가지의 문답(Six hundred questions and answers about the Book of Genesis)』,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토스나 카에사레아의 바실리오(Basil of Cesarea)의 저술, 그리고 300년 간의 기독교 초기 역사의 중요한 근원인 카에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Eusebius of Cesarea)의 『연대기(Chronicon)』가 포함된다.
구소련 연방 시절 레닌 광장으로 불리웠던 아름다운 공화국 광장은 예레반의 중심에 위치하며 모든 관광객들이 반드시 한번은 방문하는 명소이다. 이곳은 각종 야외 콘서트가 열려 예레반의 시민과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며 주변에 국립 미술관과 역사 박물관 및 중앙 우체국과 정부 청사 등의 공공 기관이 모여 있는 원형 광장이다.
1970년대에 조성된 50m 넓이에 572개의 계단을 가진 거대한 공원으로 주변의 아름다운 조각상 들이 세워진 야외 갤러리로부터 예쁜 카페들이 즐비한 시내 번화가로 연결되어 있다. 내부에는 에스컬레이터와 예술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게하르트 수도원은 아자트 계곡 맨 윗부분 깎아지른 절벽에 둘러싸여 있다. 수도원의 소재지는 기원전 시대에 신성한 샘물이 솟아나던 곳이며, 설립 당시에는 ‘동굴 사원(Monastery of the Cave)’을 뜻하는 ‘아이비랑크(Ayvirank)’라 불리웠다. 훗날 이름이 게하르트로 바뀌었는데 이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찌른 로마 병사의 창’을 뜻하는 말이다.
최초의 교회는 9세기 아랍인들의 침입 때 완전히 파괴되었으나 13세기에 프로샨(Proshyan) 왕자들의 후원을 받아 재건하였다. 이 왕자들은 죽은 후 그곳 묘지에 묻혔다.. 이 시대에는 ‘일곱 교회 수도원과 40제단 수도원(Seven Churches and the Monastery of the Forty Altars)’이라고 면친하였다.
수도원에 보관된 유명한 성물 중에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찌른 로마 병사의 창도 있으며, 이 창은 사도 유다 타대오가 예루살램에서 가져왔다고 전해진다. 이 수도원에 약 500년 동안 보존되었다가 현재는 에치미아진 대성당으로
옯겨졌다. 이 성창으로 인하여 ‘수도원의 이름이 게하르드방크(Geghardavank)’라고도 불린다. 이 때문에 아르메니아 기독교인 뿐 아니라 몇 세기 동안 순례자들에게 인기 있는 성지였다. 사도 안드레아와 요한의 유골, 여러 세기 동안 독실한 방문객들이 기증한 토지, 금전, 필사본 등도 보존되어 있다.
아르메니아의 바티칸이라 불리우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성당이다. 에치미아진 대성당은 아르메니아의 에치미아진에 위치한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대성당이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곳을 아르메니아 왕국에서 지은 첫 번째 대성당이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성당으로 알려져있다. 301년에서 303년 사이에 지어진 대성당으로 전통에 따라 아르메니아의 수호성인인 계몽자 그레고리오에 의해 세워졌고 1441년에 복원되었다. 아바스 1세 때였던 1604년에는 유물과 석재가 약탈되기도 했다. 이 성당에는 노아의 방주 조각으로 만들어진 십자가와 예수님의 허리를 찔렀던 창이 보존 되어있다.
가르니 신전(Garni Temple)은 로마의 지배를 받던 BC 1세기경에 태양신에게 바치는 신전으로 건축되었다. 건립 목적은 이 지역이 로마에 속한다는 것을 선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신전 북쪽에 남아 있는 목욕탕은 온돌로 되어 있는데, 목욕탕 바닥에 있는 모자이크는 로마시대 당시의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을 모방한 것이라고 한다.
아르메니아 브랜디의 기원은 성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승에 의하면 노아가 안류 최초로 아라랏산 부근에서 포도를 대배하여 브랜디를 만들었다고 한다. 로마 역사가 필리니우스와 타키투스에 의하면 로마 시대부터 아르메니아의 브랜디가 최 상품으로 여겨져 황제에게 진상 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잘 알려진 어르메니아 브랜디는 1887냔 설립된 '예레반 브랜디 팩토리'의 '아라랏(Ararat)과 드빈(DVIn), 1877년 설립된 '예레반 아라랏 브랜디 와인 보드카 팩토리'의 '노이(Noy)'가 있다. 이 중 예레반 브랜디 팩토리에서는 여행자들에게 직접 제조사를 방문하여 브랜디의 역사와 제조 공정 및 마시는 방법과 보관법 등을 소개하고 시음해볼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을 유료로 운영하고 있다.
노라방크는 아르메니아어로 '새로운 수도원'이란 의미이다. 아 수도원은 13세기 예헤그나조르에 위치한 아마후 강 협곡에 돌출된 험난한 붉은 절벽에 세워졌다. 이 수도원은 고리에 있는 노라 방크와 구분하여 아마후의 노라 방크라고도 불리워지며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함께 어우러진 중세 건축물의 장엄한 모습으로 유명하다.
타테브(Tatev)는 아르메니아어로 ‘주다’(to give)의 의미인 타(ta)와
‘날개’(wing)의 의미인 테브(tev)의 합성어로 ‘날개를 주다’라는 뜻이다.
타테브 명칭은 Eustathius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이라는 설이 있는데
Eustathius는 1세기에 아르메니아에 기독교를 전파한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하나인 다데오 사도의 제자였다고 한다. 그래서 4세기에 St. Eustathius의 유물이 있는 이곳에 작은 교회가 지어졌다는 것이다.
5세기경에는 이곳 교회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성지순례지가 되었으며 8세기에 이르서 Syunik의 감독(주교) 교회가 되었다. 당시 주교였던 다윗은 수도원에 Syunik 공국의 유물 박물관을 건립하였다.
906년에는 세인트 폴 피터의 교회가 세로 건축되었다. 이 후 셀죽크의 침략 때는
이곳 수도원에 보관된 유물들은 1169년 Baghaberd로 옮겨졌다.
셀주크족들의 공격과 파괴 된 수도원은 12세기 말 Zakaryan 및 Orbelyan 왕후 가족의 후원 하에 13 세기 초에 복원되다. 14세기에 렌크 티무르의 침략으로 수도원은 또다시 약탈을 당하고 일부 건물이 소실되었지만 18세기에 이르러
보수되어 16개 객실이 있는 학교 건물이 세워졌다.
타테브 수도원은 10세기에 교육 센터와 학교의 역할을 담당했으며, 그 후 14세기부터 이곳은 대학으로 언급되어서 학생들이 인도주의, 사회 과학, 음악, 작문 능력, 서예 등을 연구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중 하나로 학문의 중심지 역활을 하였다. Gladzor 대학이 1291-1384년에 폐쇄 된 후 Tatev의 대학은 동부 아르메니아의 유일한 대학으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Tatev 대학의 가장 번성 기간은 아르메니아 중세 철학자 겸 신학자 Hovhan Vorotnetsi(1,31~1,388)와 Grigor Tatevatsi(1,346~1,409)의 재임 기간 중이었다고 한다. Hovhan
Vorotnetsi은 대학의 교육개혁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입학 절차까지 까다로운 규정이 있었다고 한다.
1920년에서 1921년까지는 터키와 볼셰비키 세력을 방어하기 위해 Syunik의 공국 군주가 수도원에 머물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곳을 지배한 소련 당국에 의해 수도원은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고, 1931년 대지진으로 교회가 상당히 파괴되었으나 다시 보수하여 현재 수도원 개조되어 운영되고 있다.
중세 아르메니아 정교회의 대표적인 건축 양식의 아르메니아 정교 수도원이다.
아흐파트 수도원과 사나힌 수도원(Monasteries of Haghpat and Sanahin)은 비잔틴 양식의 수도원으로서, 10~13세기에 번성했던 키우리크 왕조(Kiurikian dynasty)의 중요 교육 기관이었다. 사나힌 수도원은 역사적으로 장식가와 서예가의 학교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아르메니아 종교 건축의 절정기를 대표하는 두 수도원은 비잔틴 교회 건축 양식과 캅카스(Kavkaz) 지역의 전통적인 토속 건축 양식이 결합하여 독특한 양식으로 발달히였다. 이곳은 1996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으로 등재되었다.
아르메니아에서 아라랏산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수도원아더.
국경 너머에 있는 아라랏산이 손에 잡힐 듯이 빤히 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한 수도원이다. 깊은 우물이란 뜻을 가진 코르 비랍 수도원은 4세기 경 성 그레고리오가 13년간 갇혀 있었던 지하 감옥 위에 7세기에 교회가 건설되기 시작하여 17세기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아르메니아인들의 영혼과 삶이 담겨있는 영산이다.
아라라트 산은 현재 터키에서 가장 높은 산이지만 과거 아르메니아의 영토였으며 이란과 아르메니아와의 접경 지대에 위치한 휴화산이다. 아르메니아 고원에 솟아난 해발 5,137m의 고산이며, 대아르메니아 봉과 소아르메니아 봉이 있다. 1829년 프리드리히 파로트와 하차투르 아보비안이 처음 이 산의 정상에 올랐다고 알려져있다. 창세기에서 노아의 방주가 대홍수 끝에 표류하다가 도착한 곳이라는 전설로 유명하다.
세반 호는 아르메니아 게가르쿠니크 주에 있으며, 아르메니아 최대이자 코카서스 지역 최대의 호수이다. 호수면은 해발 1900m에 위치하여, 민물 호수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것 중 하나이다.. 호수의 면적은 1,243 km²이다. 잘록한 부분이 있어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남쪽의 대 세반은 916km², 북쪽의 소 세반은 328 km²면적이다. 주변으로부터 28개의 강과 하천이 흘러든다.